생각하며 살아가며

작성자 이요나(admin) 시간 2023-01-28 20:02:05 조회수 129
첨부파일 :

 바울의 권면과 소망과 기원

(13:20,21)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서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바울은 서두에서 "형제를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여기서 계속하라는 말씀은 중단된 상황을 전제한 것이다. 형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며, 예수님의 유언이다. 요한복음 13장 서두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기록되었다.

 

바울은 2절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 대접한 이들이 있느니라" 기록하였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영접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나는 그들이 천사들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은 먼 길에 지친 거룩한 사람들을 섬긴 것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들은 이런 자들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속하여 바울은 "자기도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3)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술과 마약과 음행에 갇힌 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 자기 육체를 신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를 깨닫기까지는 모두가 육체에 갇힌 자들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권고하였다. 이 말씀은 바울서신의 주제이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항상 주 앞에 정결한 영혼과 몸을 주장하며,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듯이 그를 멸하실 것이라' 책망하였다.

 

바울은 5절에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하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기록하였다. 재물은 인생을 힘들게 하는 악의 권세이다. 사람이 돈에 억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는 거룩함에 이를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7,8)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믿음에 실패한 지도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끝으로 바울은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먼저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권고하였다. 이것은 형제 사랑에 속한 모든 것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의 두번째 권고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7)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희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 믿음을 본받을 만한 자들에게 순종하라”(7)는 말씀이다.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18,19)하였다.

 

최근 육신의 고통을 체감하며, 견딜 수 없는 고독감에 시달렸다. 어차피 육체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혼자라는 고독감은 감내할 수 없는 시간이다. 죽음을 넘어야 주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이지만, 홀로 살아있는 분초를 세어야 하는 고통은 산지옥이다. 어쩌면 바울도 홀로의 외로움을 벗기 위하여 제자들의 중보를 요청하며 다시 만나기를 간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멘. (이요나 목사)